2000년 7월 4일(토)(최종문안)

 

 

1)1998년 10월 17일 비문

*이 비문은 충북 괴산 제월대에 세웠던 비문으로  임형택, 강영주, 김승환이 썼던 원문이다. 이 비문은 1999년 5월 28일 철거되었다. 육이오의 한과 분단의 상처를 잊지 못하는 많은 분들은 벽초 홍명희 문학비 전체를 강제 철거하겠다고 했기에 우리는 십여 차례의 만남을 통하여 의견을 조정하기에 이르렀다.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는 괴산 재향군인회 등과 협의를 통하여 그 분들의 한과 아픔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양측이 서로 한발씩 양보하여 문학비는 존속하기로 했고 비문은 다시 쓸 것을 결정했다. 그리고 대승적인 견지에서 우리 문인들은 아픔의 눈물을 삼키며 이 비문을 우리의 손으로 철거하기로 했다. 민족통일을 위한 비장한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분단의 고통이 우리 삶의 곳곳에서 우리를 관리하고 있는 이 현실을 슬퍼하면서 통일을 위한 대장정의 한 모롱이에서 이 비문을 철거한다.

 

  민족문학과 민족해방운동의 큰 봉우리 벽초 홍명희 선생(1880 - 1968)은 충북 괴산 인산리(동부리450-1)에서 태어나셨다. 선생은 경술국치 때 순국하신 부친 홍범식 의사의 뜻을 받들어 평생을 민족의 자주 독립과 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하셨다.
  선생은 일찍이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다가 귀국하여 1919년 3,1운동 때 괴산에서 충북 지역 최초로 만세시위를 주도하셨다. 그로 인해 옥고를 치른 후에 동아일보 주필과 시대일보 사장으로서 언론 창달에 기여하셨으며, 당시 민족교육기관으로 이름 높던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하셨다. 또한 일제 강점기 최대의 항일운동 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여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자 노력하셨다. 그리고 1928년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10여 년에 걸쳐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집필하셨다. 이 「임꺽정」은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로 민족문학사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 맑고 인정 두터운 이곳 괴산은 선생의 삶의 자취가 역력한 곳이요, 민족 정신이 살아있는 역사의 고장이다. 삼가 옷깃을 여미고 선생의 뜻을 기리며 민족이 진정 하나가 되는 날을 소망하면서 여기 선생의 고향 땅에 작은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1998년 10월 17일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

 

 

2)벽초 비문 수정

*이 비문은 수 십번에 걸처 검토하여 2000년 2월 25일 쓴 것으로 새로 새겨 넣을 비문 초안이다.

   근대민족사와 민족문학사의 큰 봉우리 벽초 홍명희(1888 - 1968)는 충북 괴산 인산리(동부리450-1)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의 벽초는 경술국치 때 순국한 부친 홍범식 의사(義士)의 뜻을 받들어 민족의 자주 독립과 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가 일찍이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다가 귀국하여 1919년 3·1운동 때 괴산에서 충북 지역 최초로 만세시위를 주도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3·1운동으로 인해 옥고를 치른 후에 동아일보 주필과 시대일보 사장으로서 언론 창달에 기여했으며, 당시 민족교육기관으로 이름 높던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한 바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 최대의 항일운동 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여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1928년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10여 년에 걸쳐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집필하여 민족적 저항을 문학작품으로 표현했다. 이 『임꺽정』은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로 민족문학사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해방 이후 남북의 분단을 막아보고자 김구 등과 함께 1948년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 차 북한으로 넘어간 후 남한에 돌아오지 못했다. 1950년 북한 정권의 부수상으로 재임할 당시 6·25라는 민족상잔이 있었으며 1968년 북한에서 타계할 때까지 그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이것은 한 개인의 비극인 동시에 민족 전체의 비극이자 고통스런 역사이며 눈물이요 아픔이다.
  물 맑고 인정 두터운 이곳 괴산은 그의 삶의 자취가 역력한 곳이요, 민족 정신이 살아 있는 역사의 고장이다. 삼가 옷깃을 여미고 그의 뜻을 기리며 민족이 진정 하나가 되는 날을 소망하면서 여기 그의 고향 땅에 작은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임형택 강영주 김승환)

 
                        년   월   일
                   벽초문학비건립추진위원회

 

 

3)2000년 6월 12일 비문 (*최종 협의 문안)

 

 

       다음 비문은 2000년 6월 12일 괴산의 원호단체 등과 협의한 것으로 최종문안이다. 우리는 이 합의과정에서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분단체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문학이 민족통일에 기여할 수 있고 또 기여해야 하며 적극적으로 분단 모순을 해결하는 데 앞장 서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무수히 아픔을 이기고 어려운 과정을 넘어서 분단 체제 극복을 위한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제 스스로 바뀌지 않는다. 역사는 바꾸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과 노력에 의해서만 바뀐다. 우리는 민족사의 한 부분에 자그마한 돌 하나를 놓는 조심스러운 심정으로 비문 문제를 대해왔다. 이 비문은 뜯겨진 흔적, 아픈 역사를 뒤로 하고 2000년 가을 제5회 벽초 홍명희 문학제 때 새겨 넣을 것이다.

      

     근대민족문학사의 큰 봉우리 벽초 홍명희(1888 - 1968)는 경술국치 때 순국한 홍범식 의사(義士)의 아들로 충북 괴산 인산리(동부리450-1 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다가 귀국하여 1919년 3·1운동 때 괴산에서 충북 지역 최초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른 후에 동아일보 주필과 시대일보 사장, 당시 민족교육기관으로 이름 높던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한 바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 최대의 항일운동 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여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1928년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10여 년에 걸쳐 소설 『임꺽정(林巨正)』을 집필하여 민족적 저항을 문학작품으로 표현했다. 이 『임꺽정』은 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재현한 역사소설이다.
    그는 1948년 김구 등과 함께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 차 북한으로 넘어간 후 남한에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1950년 북한 정권의 부수상으로 재임할 당시 6·25라는 민족상잔이 있었으며 1968년 북한에서 타계할 때까지 그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이것은 한 개인의 비극인 동시에 민족 전체의 비극이자 고통스런 역사이며 눈물이요 아픔이다.
     그의 삶의 자취가 역력한 이곳 괴산은 민족정신이 살아 있는 역사의 고장이다. 삼가 옷깃을 여미고 민족이 진정 하나가 되는 날을 소망하면서 여기 그의 고향 땅에 작은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임형택 강영주 김승환 라용찬)